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 우리집 리모컨의 전권은 아빠가 쥐고 있었다. 아빠는 월화수목 열시 드라마 보는 걸 역겨워했고, 좋아하는 예능을 한 주라도 빼먹으면 큰일이라도 날까봐 주말 저녁엔 외식도 하지 않으셨다. 난 친구들이랑 드라마 얘기를 하고 싶어도 알아듣지를 못하니 예능이라도 열심히 봤다. 갖은 예능 프로를 시청하면서 방구석 웃음감별사로 컸다. 그러니 나에게는 웃음에 대한 나름대로 엄격한 기준이 있다. 1. 말을 똑부러지게 잘하는 사람이 좋고, 2. 몸으로 웃기는 건 선호하지 않는다. 3. 예능을 위해 일부러 바보짓하는 것도 별로. (이 기준은 단순한 예능 취향일 뿐이고, 사람에 대한 취향과는 다르다는 것을 밝혀둔다. 스페셜하게 스튜핏한 사람이 최애이니까.)

난 말로 웃기는 게 좋다. 숨이 차도록 댄스 신고식하고 누구 잡으러 다니는 것보다 당연하지가 더 재밌고, 무한도전도 회의실에서 아저씨들끼리 떠들 때가 훨씬 웃기다. 그러므로 예능에서의 전진은 내게 별로 취향은 아닌 사람 / 부담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하는 사람 /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좀 안쓰러운 사람(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전진의 여고생4 때문인 듯)/ 불완전한 예능인에 그쳤던 것 같다. 죽어라 뛰어다니고, 여장하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말하고, 다른 사람들 옆에서 꽃같이 수줍게 웃던… 무척 예뻤지만 내게 웃음을 주지는 않았던.


난 아주 늦게, 올해가 되어서야 신화창조가 되었다. 그냥 신화에 좀 관심 있다에서 그치지 않고, 신화창조라는 팬덤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다. 십여 년 전 신화방송 보고 신화 팬이 됐다는 친구들에게 ‘니들 취향 참 특이하다. 턱이 시꺼먼 그런 아이돌의 기본도 못 지키는 아저씨들이 뭐가 좋다고 그러냐’는 말을 했었는데. 십몇 년 뒤의 내가 여기로 잡혀올 줄은, 시꺼먼 턱을 보며 아저씨들 완전 남자다우시고요, 완전 사랑해요라고 외칠 줄은 상상도 못하고 아주 경거망동했다. 단정적이고 무례한 학생이었던 나의 업보일지도 모른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지금은 즐겁다. 즐거움 느끼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된 덕분에 이 순간을 아주 귀하게 여기고 있다.


입덕 직후 당연히 신화방송을 제일 먼저 챙겨봤다. 멤버들 간 관계성도 알고 싶고 그저 크게 웃고 싶은 맘도 있었으니까. 원하던 대로 크게 웃었고, 최애 멤버도 정착했다. 최애는 다른 멤버임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에 대한 나의 감상은 다음과 같다 : 신화는 전진 없이 예능 절대 하면 안 됨. 이건 내 의견입니다.

이 팀의 여섯 멤버들은 한 명 한 명의 장단점이 너무 강하다. 짐승들처럼 서로의 털을 헤집으며 보살피고 또 동시에 질책하며 시대를 헤쳐왔을 것이다. 때론 똘똘 뭉쳐 있는 게 개이득이었고 또 때로는 팀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 개인 활동에 개손해가 되기도 했을 거다. 두 달 동안 나름 열심히 분석해보니 79년생 4인은 팀이 ‘어떻게 보이게 할 건지’ 외부적인 이미지에 기여했고, 두 명의 의젓한 동생들은 ‘어떻게 굴러갈 건지’ 내부적인 결속에 아주 크게 기여한 것 같다. 예컨대 중화를 했다는 말이다. 망나니 같은 79년생들에게 형과 동생의 역할분담이라는 건 좀 당연한 것이라 우리 멤버들 완전 사랑합니다 눈빛 보내는 전진과 나긋나긋하고 차분하게 우리 제발 사이좋게 잘 지내자고 압박을 주는 앤디의 존재감은 아주 큰 것이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특히 전진의 ’완전 사랑합니다‘ 눈빛은 군백기를 끝낸 오빠들의 첫 예능에서 빛을 발했다. 영원히 내게 웃음을 주지 않을 것만 같던 전진을 보며 난 어느 순간부터… ‘아 진이는 레알 완전 진짜 사랑입니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전진은 쫑긋 세운 귀를 레이더처럼 활용하고 있어서 멤버들의 개성 강한 멘트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편집실에서 가차 없이 버려졌을 멘트도 이 남자의 눈 반짝임 한 번에 되살아난다. 웃음이 터져야 하는 순간을 귀신같이 알고 적재적소에 멘트를 찔러주며 딜도 넣고 탱킹도 하고 서포트까지 다 한다. 어느 만화의 어느 캐릭터가 ‘재능은 꽃피우는 것, 센스는 갈고 닦는 것’이라고 했는데, 전진이라는 남자가 이 말을 실현한 것이 틀림없다. 이 남자는 혹독한 예능 세계에서 뺑이 치며 수련한 경험치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알고 지낸 멤버들에 대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말하고 행동한다.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되돌아올 것을 알고, 저 사람의 그 말은 어떤 방식을 거쳐 나온 것인지 생각한다. 그의 빅데이터는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가 멤버들에게 가진 애정은 너무나도 완전하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전진이 가진 애정의 아주 일부분은 그의 생채기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전진에게 가지는 애정의 일정 부분에도 연민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굳이 알고 싶어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안타까운 사연을 금방 알아낼 수 있는 이 시대에, 사람이라면 응당히 안타까워할 개인사를 가진 이 남자는 아주 매력적인 인물임에 틀림없으므로.

그러나 그 개인사는 아주 일부분일 뿐, 그의 인생 전체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콘텐츠로 소비해선 안 되지만 이 남자는 소비당하는 것을 기꺼이 선택했다. 그 때문에 전진이라는 인물이 생각보다 약하고 아픈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있지만 이 사람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이 사람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요소는 아픔이 아니라, 그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씩씩함과 사랑이다. 전진은 어떤 아픔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랑을 주는 사람들에게 덩달아 사랑을 표현하거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기를 선택한다. 나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로맨티시스트라, 신화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전진일 거라고 감히 추측한다. 무한한 신뢰를 주고 순수한 애정을 쏟아붓는 사람. 장난을 칠 때도 확실하게 치고, 감정을 전할 때도 확실하게 전하며, 화끈하게 놀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

글을 쓰다 문득 완벽과 완전의 차이가 궁금해져 AI를 두드려 물어보니 흠이 없는 상태를 완벽하다고 하고, 빠진 게 없는 상태는 완전하다고 한다. 전진이 갖춘 걸 나열해볼까요… 춤도 무지 잘 추고 노래도 곧잘한다. 몸매는 군침이 돌고 얼굴은 하늘나라 선녀님이다. 마음씨는 말할 것도 없이 소문난 비단결이다. 너무너무 고와서 가끔 흠집이 나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AS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갖췄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완전하다. 인간이 가져야 마땅한 모든 아름다운 조건을 갖췄다.

난 요즘 완전을 빼면 완전 말도 못하는 상태가 됐다. 완전이라는 명사가 부사처럼 쓰이게 된 계기를 생각하며 또 피식피식 웃는 중이다. 말도 안 되는 말을 결국 말이 되게 만든 사람 박충재. 결국 내게 웃음까지 다 준 사람 박충재. 내겐 너무 완전한 당신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완전.